고려거란전쟁 다시보기 역사 알아보기

고려거란전쟁 드라마가 핫이슈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려거란전쟁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그 기반으로 다시보기 방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거란전쟁은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993년 ~ 1018년)

대규모 병력이 동원 된 큰 전쟁 외에도 국지적인 전투까지 포함하면 6회 이상으로 세부 구분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역사적 분기가 되고, 중요했던 전쟁으로 추려서 일반적으로는 3차 전쟁으로 구분됩니다. (993년에 벌어진 1차 전쟁, 현종이 즉위한 1010년에 쳐들어 온 2차 전쟁, 마지막으로 현종 9년인 1018년의 3차 전쟁)

고려와 거란의 건국

우선 거란은 시라무렌강 유역을 주요 근거지로 삼았던 유목 민족입니다. 원래 거란은 유목 민족의 특성상 하나로 규합되지 못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대륙의 초원 지역에서 살고 있었으나, 10세기 초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통치자가 등장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하는 것에 성공하였고, 기어이 916년에는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거란입니다.

이 유목 민족은 스스로의 국명을 거란이라 불렀으나, 요(遼)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반대로 태조 왕건이 후삼국 시대의 전란을 마무리 하고, 고려를 건국 한 것은 918년이기 때문에 거란이 2년 먼저 건국 된 것입니다.

이후 거란은 계속 된 정복 전쟁을 치루며, 세력을 키워 나갔고 심지어는 만주에 위치한 발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기 까지 합니다. 말을 타고 약탈을 일삼던 무리들이 이제는 주변 국가들과 교류를 하고 외교를 할 정도로 위상과 국력이 강해진 것입니다.

고려와 거란의 외교

고려와 거란이 유의미하게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말, 고려 성종대의 일입니다.

하지만 두 나라가 910년 대에 건국 된 것을 생각하면 거의 몇십년 간이나 교류가 없던 것인데, 그러한 일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다스리던 942년(태조 25년)에 고려는 거란과의 단교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단교를 선언한 이유는 태조 왕건이 보기에 거란은 발해와 우호를 맺고 있다가 갑자기 배반하여 멸망시켰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나라와 민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란의 사신단이 고려에 왔을 때, 그들을 섬에 유배하고 이들이 데려온 낙타를 만부교라는 다리 아래에 매어두어 굶겨 죽이는 만부교 사건이 터집니다. 심지어 943년(태조 26년)에 태조 왕건은 후대 왕들에게 거란은 짐승같은 나라이며 풍속과 언어도 다르니, 문물, 제도를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기까지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강력하고 악한 나라(거란)가 이웃에 있으니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도록 하라”는 권고를 남기는 등 거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경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태조 왕건의 거란은 견제하고, 송나라와는 가까이 지내는 외교 노선으로 인해 고려와 거란은 50년 정도를 단교하며 지냈습니다.

1차 고려거란전쟁

그렇게 거란과의 단교 기간이 길어지던 10세기 후반(900년대 말),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중국 대륙의 5대 10국 혼란기가 끝나고, 마침내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실제로 그 때부터 거란과 송이 강력하게 대치하는 형세가 이루어졌는데, 986년에 결국 송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거란을 공격하였습니다. 참고로 이 때의 기록을 보면 송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협공을 제안했으나, 고려는 군대를 출병시키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에서 송나라는 대패를 하게 되며, 이후로 송나라가 수비적인 입장을 취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파는 오히려 고려와 여진에게 미치게 되는데, 송나라가 거란을 공격할 의지가 사라지자 거란은 그 때부터 동쪽의 여진 부족을 제압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란의 세력은 압록강 방면까지 확장하게 되었고, 991년(성종 10년)에는 압록강 하류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는 등 고려보다 한발 빠르게 고려와의 전쟁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이에 반해 고려는 거란이 움직이기 전까지도 압록강 일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984년(성종 3년)에 압록강 유역을 자신들의 밑에 두려다가 여진과 충돌하여 다시 발을 뺐던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고려 조차도 바로 앞마당이나 다름 없는 압록강 유역을 어찌하지 못했는데, 여진도 아닌 거란이 갑자기 나타나 기지를 세운 것입니다.

이렇듯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는데, 반대로 그 당시에 고려는 성종이 즉위한 이후로 외세와의 전쟁 준비 보다는 내치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북방의 성과 산성에 대한 축성 노력이 많이 줄었고, 압록강 유역을 두고 여진족과 싸울만큼 여진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993년(성종 12년) 겨울에 거란의 침공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1차 고려거란전쟁입니다.

거란은 소항덕(소손녕, 손녕은 자입니다)의 지휘 하에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고 역사서에 적혀 있는데, 80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거란의 인구나 생활상을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부풀려진 숫자로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란은 그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란의 공격이 임박하자 고려에 이를 알리러온 여진 부족이 있었는데, 여진족은 통일 국가가 아닌 여러 곳으로 흩어져서 다양한 부족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고려와 싸우는 부족이 있으면, 반대로 고려에 협조적인 부족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는 여진족이 전해 준 첩보를 믿지 않았고, 심지어는 척후병을 보내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거란이 코앞까지 당도 한 뒤, 다시 여진족이 거란의 침공 소식을 재차 오자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허겁지겁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준비가 늦었던 만큼, 고려는 첫 전투에서 패배하여 봉산군(蓬山郡)을 잃고 선봉인 윤서안이 거란에 잡혀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래도 다행히 이후 안융진(安戎鎭)에서 벌어진 전투는 방어에 성공하였고, 대치 상태에서 서희가 거란과 협상을 하여 설득시키면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거란의 고구려 옛 영토 반환 요구는 차단하고, 압록강 동쪽 지역(강동 6주)에 대해 고려의 영유권은 인정받은 것은 외교가 왜 중요한지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성종과 고려도 정신을 차려, 서희의 담판으로 얻어낸 그 지역에 강동6주를 설치하여 통제력을 확보하고, 성벽을 쌓는 등 방어에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거란이 강동 6주를 넘겨 준 이유

거란이 고려를 공격하러 와서, 역으로 압록강 유역의 강동6주를 넘겨주고 간 것이 서희가 뛰어나고, 거란이 우둔해서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왜냐하면 거란은 고려와 휴전을 하고 떠남으로써 강동6주만 주고 떠난 것이 아니라, 고려가 송나라와 단교할 것을 요구했고 고려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거란의 목적은 고려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켜, 양쪽 모두를 신경써야 하는 복잡한 상황을 피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차 고려거란전쟁

1차 고려거란전쟁 이후 고려와 거란은 그래도 한동안 평화로운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의 긴장 관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란은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치는 상황을 막아두고, 송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압박했고, 1004년(목종 7년)에는 거란 황제인 성종(聖宗, 고려의 성종과는 다릅니다)과 그의 어머니인 실권자 승천황태후가 직접 대군을 끌고 나서는 친정(親征)을 하기에 이릅니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직접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거란군은 싸울 때마다 송군을 격파하며 진격하여,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 인근에 있는 전연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화의를 맺었는데, 이것이 바로 ‘전연(澶淵)의 맹약’이라 불리는 중국 역사에서도 손 꼽힐만큼 중요한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송나라는 매년 거란에게 엄청난 양의 은과 비단을 보내게 되었고, 송나라 황제는 거란의 황태후를 숙모로 대우하는 예우를 차리게 됩니다. 물론 송나라는 북방 유목 민족과 달리 비옥한 토지와 해양을 통한 무역으로 이루어낸 경제력으로 거란에 대한 조공을 해결할 수는 있었으나, 중국 중원의 통일 왕조가 유목 민족에게 압도 당하여 맺은 굴욕적인 첫번째 조약 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문제는 거란이 송나라와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압했기 때문에 전연의 맹약 이후로 거란이 고려에 대해서 압박을 가 시작할 가능성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불화가 생길 사건 없이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이어지기는 어려웠습니다.

강조의 정변 – 고려거란전쟁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명분은 거란과 고려의 불화가 아닌 고려 중앙에서 발생하며, 그것은 1009년(목종 12년)에 발생한 강조의 정변이었습니다.

고려의 7대 국왕인 목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오랜 시간 동안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종은 병에 걸려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고, 자연스레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강조라는 장수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 할 뿐만 아니라, 시해하고 권력에서 떨여져 출가하여 스님 생활을 하던 현종을 중앙으로 불러 옹립하게 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고려는 곧바로 거란에 거짓으로 사신을 보내 전왕이었던 목종이 병으로 사망하여 새로운 왕이 즉위했음을 알렸습니다. 거란은 이로부터 1년 동안이나 별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으며 무난히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변경 지역에서 고려군과 분란이 있던 여진족 중 하나가 거란으로 도망쳐 피해를 호소하며, 고려의 왕위계승이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닌 강조의 정변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자 상황은 급속도로 전개 되기 시작합니다. 거란의 황제인 성종이 대역을 일으킨 죄인 강조를 처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숴 고려 침공을 지시한 것입니다.

고려는 당황하여 즉각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를 통해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소용 없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거란이 송나라를 굴복시켜 조공을 받기 시작한 이후, 거란에게 눈에 거슬리는 것은 고려였기 때문에 고려와 화친을 맺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1010년(현종 원년) 겨울, 거란의 성종은 직접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고려는 거란의 공격을 막기 위해 강조의 지휘 아래 30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에서 벌어졌는데,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흥화진을 지키며 수차례에 걸친 거란의 거센 공격을 방어하는 것에 성공합니다.

상황이 생각보다 순조롭지 않자 거란군은 계획을 바꿔서,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잔류시키고, 나머지 반은 개경을 향해 곧장 내려갑니다. 다행히도 고려는 성공적으로 방어 했으나, 흥화진을 포기하고 우회한 거란군이 통주에서 고려군과 대치합니다.

통주는 강조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자리 잡은 곳으로, 전략적인 요충지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강조는 먼저 자리를 잡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전투 초반에는 잘 싸웠지만, 후반에 이르자 거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여 방심하다가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 전투로 인해 강조는 전사하고, 그의 부장인 이현운은 포로로 잡히는 등 고려군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통주성(通州城)이 함락되지 않고 버텨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려의 주력 부대가 대패하면서 고려군의 전열이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서경(西京) 역시 거란으로부터 지켜냈으나, 거란군이 개경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규모 야전 부대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국왕인 현종은 강감찬(姜邯贊)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치욕을 겪습니다. 현종은 피난 중에 왕으로서는 겪기 힘든 온갖 고초를 겪게 되며, 거란군에게 점령된 개경은 곳곳이 파괴되고 맙니다.

현종은 결국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고, 거란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그제서야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란군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거란군은 거점 성을 함락시키지 않고 곧장 개경을 향해 내려갔다보니 후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이 돌아가는 거란군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공격을 통해서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던 수많은 고려인 포로를 구출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전을 주도했던 양규가 전투 도중 목숨을 잃는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차 고려거란전쟁

2차 고려거란전쟁의 종전 조건은 현종이 거란의 황제를 직접 찾아가는 것이었는데, 거란군이 물러가자 현종은 병환을 변명 삼아 거란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전 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거란에 가지 않겠다고 못 박았는데, 고려가 이런 입장을 밝히자, 거란의 성종은 1차 전쟁 때 넘겨 준 강동 6주 지역을 내놓을 것을 고려 측에 요구합니다. 그러나 고려가 그 요구를 들어줄 리는 없었으며, 이 때 부터 거란은 외교가 아닌 무력을 통해 강동 6주를 빼앗으려는 국지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려는 현재의 의주(義州) 지역을 빼앗기긴 했으나, 그 외의 지역은 빼앗기지 않고 잘 막아냈습니다.

결국 거란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대규모 병력을 소집하여 고려 침공을 준비하며, 1018년(현종 9년)에 소배압(蕭排押)을 사령관으로 삼아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소배압은 1차 전쟁 당시, 거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소항덕의 형으로서 2차 전쟁에서는 선봉을 맡기도 한 맹장이었습니다. (참고로 조선 시대에 편찬 된 역사 서적 고려사(高麗史)에서는 3차 전쟁 당시의 사령관을 소손녕이라고 기록했으나, 이것은 오류) 무엇보다 소배압과 소항덕은 거란 황실의 부마(임금의 사위)였고, 그 외의 장수들 역시 송과 전쟁을 치루면서 계속해서 전공을 쌓은 노련한 장수들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당시 3차 전쟁 당시의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을 1차 전쟁처럼 화친이나 조공 요구를 하러 간 것이 아닌, 확실한 승리를 얻기 위해 침공을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3차 전쟁 당시 고려군은 거란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대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현종은 강감찬을 총지휘관으로, 그리고 강민첨(姜民瞻)을 부관으로 임명하고, 그 휘하에 20만의 병력을 소집하는 등 강감찬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거란군은 공략이 어려운 흥화진을 우회하여 이번에도 곧바로 개경으로 향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감찬은 거란군이 지나는 길목인 흥화진 인근의 삼교천(三橋川)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는데, 이 때 강감찬이 소가죽으로 물길을 막았다가 터뜨려 거란군을 혼란에 빠트린 일화가 유명합니다.

3차 전쟁에서 거란군의 전략이자 목표는 다른 지역을 공략하지 않고, 개경으로 직접 향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거란군이 고려군과 싸우지 않고 계속해서 개경으로만 향하자, 강감찬은 그 길목마다 병력을 파견하여 계속해서 급습하는 한편, 1만의 병사는 개경으로 보내 수비를 강화하였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북면에서 온 3천의 병사들도 개경 방어에 합류하니, 수비 태세를 단단히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종은 성 밖의 백성들을 전부 성 안으로 대피시키고 청야전술(성 주변에 보급이 될만한 물자를 전부 없애고, 성내에서는 많은 비축 물자와 자급자족하며 버티는 농성 전술)을 생각하며 농성을 준비하였습니다.

소배압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개경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중간 중간 지속적으로 고려군에게 피해를 입으며 병력을 야금 야금 잃고 말았고, 개경 인근까지 도달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척후로 보냈던 기병 3백이 금교역(金郊驛)에서 고려군에게 전멸당하자 희망을 잃고 철군을 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중간 거점도 마련하지 않고, 깊숙이 들어왔던 거란군이 돌아가는 길은 험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려군은 연주와 위주 일대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피해를 주었고, 1019년(현종 19년) 2월에는 그 유명한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대승을 거둬 거란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당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하는데, 10만의 병사가 수천으로 줄어서 돌아간 것입니다.

소배압은 목숨은 부지 했으나, 거란 본국에서 귀양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3차 전쟁 이후 – 고려거란전쟁

3차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란의 성종은 기회만 생기면 고려를 침공하려는 의도를 밝혔는데, 내부적으로 강한 반대 의견에 부딪혔고, 고려에서는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여 사대 관계를 회복할 것을 청하니 다시 침공할 명분도 부족했기 때문에 거란의 추가 침공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려거란전쟁의 결과

고려거란전쟁은 많은 희생과 고통을 동반 했지만, 거란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려는 동북아 정세에서 높은 위상을 가질 수 있었고, 거란도 고려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추가 침공을 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고려 만큼이나 거란에게 큰 고통을 받았던 송나라는 고려의 국력을 높게 보고,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우호적인 관계와 교류를 통해 경제적, 문화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려는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고, 고려의 왕실은 현종의 혈통이 왕위를 계속 계승하며 현종은 그나마 의미라면 의미있는 보상을 받은 셈이 되었습니다.